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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함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박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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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에서 성숙을 ‘애매함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live with ambiguity)이라고 정의한 것을 읽었습니다. 정말 탁월한 정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나, 미숙한 사람을 보면 흑백논리에 지배를 받는 경우를 많이 보는 까닭입니다. 제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옳든지 그르든지, 맞든지 틀리든지, 둘 중의 하나라야 이해합니다. 둘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것,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흑백논리에는 애매함과 불확실성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없고 심리적으로도 편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그 사이의 것들은 모두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떤 의견이든지 한쪽이 절대적으로 맞고, 다른 쪽은 절대적으로 틀리는 경우가 있을까요?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양쪽 다 일리가 있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제가 되뇌이고 또 되뇌이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목사이지만, 내가 신앙의 표준은 아니다.”, “바른 신앙에는 긴장이 있다. 하나님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오지는 않은 것처럼. 우리는 그 사이를 살고 있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흑백논리에 빠져,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무시하게 되면 어려움과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경륜이 쌓이게 되면, 양쪽을 다 보게 되고, 양쪽 다 일리가 있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선조들은 나이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 경륜이 쌓이면 귀가 부드러워져서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양쪽의 수용에는 심리적인 긴장감이 있습니다. 때로는 상충되어 보이는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수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며 이런 긴장감이 가장 많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위임과 관련되었을 때입니다. 제 교회가 아닌 예수님의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푸른이여러분을 신뢰하고, 필요한 일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위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서둘러 위임하면 방치가 되고, 너무 늦게 위임하면 수동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지요. 언제 얼만큼이 적절한 위임이고, 또 언제 얼만큼이 방치인지 배워가지만 늘 긴장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애매함을 수용 못해서 지나치게 긴장하는 분’과 ‘너무 수용해서 긴장이라고는 없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 중간에서 지혜를 구하는 성숙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구요. ‘애매함’을 수용하는 만큼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노파심에 애매함을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런 줏대 없는 삶 말고, 적어도 흑백논리에 갇히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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